- 소녀의 숨소리가 어느새 점령군의 군화 소리처럼 폭력적으로 귓구멍을 울리고 있었다. 숨을 쉴 때마다 불끈한 가슴과 쇄골과 직립한 창 끝이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. 쇄골을 치고 나온 땀방울 하나가 한순간 창 끝을 적시면서 또르르 굴러 셔츠 안으로 재빨리 흘러들어갔다.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았다. (24하8)



- 그러나, 서지우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여전히 '멍청'했다.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,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, 그에겐 그게 없었다. (69하7)



- 어떤 낱말에서 각자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격은 때로 저승과 이승만큼 멀거든, 가령 네게 연필은 연필이지만 마음 놓고 공부할 환경을 살지 못했던 내게 연필은 눈물이다. "할아부지, 제 연필 좀 깎아주세요"라고 네가 말하면 나에겐 그 말이 이렇게 들린다. "할아부지, 제 눈물 좀 닦아주세요." (94상2)



- 내게 은교는 누구이고 무엇일까. (172상8)



- 보호해야 할 분은 은교가 아니라 선생님이다.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. (176상4)



- 너를 거기 

  구름 젖은 길가에 두고 떠날 때

  

  나는 매번 

  류머티즘에 걸린다 (184)



- 은교는 나에게 슬픔과 함께, 생애를 통해 경험해보지 못한, 청춘의 광채와 위로를 주었다. 사실이다. (194하6)


  

- 그애가 좋다면 매일 태워다주는 게 왜 어렵겠는가. 날아갈 듯 쾌청한 날씨였다. 나무들과 풀과 심지어 전봇대까지 다 새로웠다. 여러 날 꽉 막혀 있던 가슴 한가운데 하얀 신작로 하나 시원하게 놓여지는 느낌이었다. (196상3)



- 나는 우단으로 만든 토끼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. 그 애가 내 주머니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. 죽음은 더이상 생각나지 않았다.



- 혁명보다 더 환한, 아침 같은 세계의 발견이 나를 기쁘게 했고, 피어리게 불타고 있는 저물녘 놀빛의 실존이 나를 슬프게 했다. (198상1)



- 실존의 난로에선 여전히 생살이 타고 있었지만, 나의 꿈길은, 눈물보다 투명하고 초롱보다 환했다. 나는 꿈의 비단길을 타고 비행을 계속했다.



- "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." (200상1)



- 내게 연애란,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,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,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,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.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,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, 고유명사였다. (202하3)



-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'범죄'가 아니다, 라고 나는 말했다. 노인은 '기형'이 아니다, 라고 나는 말했다.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, 라고 또 나는 말했다. 노인은, 그냥 자연일 뿐이다.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.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,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. (250하5)



- 그러기위해 필요하다면, 은교라도, 기꺼이 활용할 마음의 준비가 나는 되어 있었다. (253상4)



- 나는 원래 문학잡지를 잘 읽지 않는다. 문학지가 다루는 문제들은 흔히 문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 일쑤이고, 정략적 전술로붜 자유롭거나 초연한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. (266하5)



- 세상은 이적요가 오로지 시만 썼다고 칭송하지만 그것은 나의 전략에 속은 것에 불과했다. (268상1)



- 내가 마치 '사람들의 나라'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'늙은 당나귀' 같았다. (275상4)



- 카페 안의 젊은 그들과 나 사이엔 전쟁에서의 전선보다 더 삼엄한 경계선이 쳐져 있었다. 잔인한 금줄이었다. 세대 간의 단층을 왜 모르겠는가.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단층은 언제나 존재해왔다. 하지만 내가 저들과 친구로 지내자고 요구한 바 없고, 내가 저들의 자리에 끼어 앉으려 한 적이 없는데, 어찌하여 한 지붕 아래 있는 것만도 참지 못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. 세계 어디에 저렇게 또래들만 모여 앉아 늙은이는 '무조건 나가달라' 고 말하는 곳이 있을까. (275하5)



- 그애와 촛불이 켜진 카페에서 마주 앉아 와인으로 건배를 하면서 저녁 한때를 보내고 싶은 꿈이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꿈이던가. (279상2)



- 선생님에게 공포감을 느낄수록 은교를 향한 열망이 더 격렬해지는 내 심리가 참 묘하다. (326상7)



-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, 나는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고, 은교도 잃고 싶지 않다.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. 때로 선생님이 나의 장애물이며 짐이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,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이, 선생님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백 배 낫다. (327상2)



-내가 은교를 당신의 노망난, 미친 욕망으로부터 지킬 것이므로, 아니, 은교만이 아니라 선생님, 당신도 나는 지켜야 한다. 은교를 '늙은이'로부터 지키는 것이 '늙은이'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. (330상8)



-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

 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래므의 아름다운 불빛

 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

 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 

      - R. M. 릴케(Rilke), 『말테의 수기』에서 (348하3)



-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

 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

 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

      - 시집 『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』, 「소음」에서 (369하4)



- "확실한 건요, 할아부지하고 서선생님, 서로가 싶이 사랑하셨다는 거예요. 제가 낄 자리가 없을 정도로요! 제가 소외감 느낄 정도로요!" (377하3)



- 생의 마지막에 너를 통해 만나 경험한 본능의 해방이야말로, 나의 유일한 인생, 나의 싱싱한 행복이었다. (398상8)





※ 괄호는 쪽수와 행임. (예. 318상4 → 318쪽 위에서 넷째줄)